일곱번째 대륙 - 미하엘 하네케 움직이는 그림

변태의 탄생




감독님 수상 ㅊㅋㅊㅋ

 작가주의라는 용어의 부당한 폭력성과 편가르기, 그리고 제한적인 의미. 이들에 보다 너그러운 사람이라면 작가주의 자체를 스타일 보다는 말하려는 바에 놓고 보아도 별 무리없이 받아 들여주지 않을까? 형식보다는 태도에 대한 문제. 구체적인 가늠선이 없지만 대충은 알거같은 정신적인 태도말이다. 아니 너무 안일한가.
 여튼 하네케의 하얀 리본의 수상 소식과 더불어 작년 PIFF에서 보지 못한 설움까지 겹쳐서 왜인지 하네케에 대해 몇글자 씨부리고 싶어졌다. 특히 그의 변태성의 산고라 할 수 있는 데뷔작에 대해서. 
 다시 작가주의에 대해 돌아가서, 그 인간이 얼마나 예술적인가 혹은 진지한가에 대한 척도는 역시 첫번째 작품에서 결정나는 듯 싶다. 작가의 사상이나 이념에 커다란 변화가 없다면야 그 이후는 라이프 워크라 할 수 있는 주제에 대한 변주나 혹은 이를 좀 더 매끈하게 보여줄 방법에 대한 연구일 뿐이니까. 

홈비디오
 
 영화가 시작되면 감독은 관객에게 하나의 조건을 거는데, 이는 눈을 크게 뜨고 직시할 것 이라는 주문에 가깝다. 마치 내가 지금부터 일가족 자살 사건의 전말을 밝혀주지 그러니까 똑똑히 보라고 하는 태도처럼. 혹시 눈이 보이지 않는다며 영화적인 사실에서 눈을 돌리려는 관객에게는 친절한 위트를 덧붙이는 것을 잊지 않는다. 너는 거짓말을 하고 있어. 참나 이쯤되면 협박에 가깝다.
 그런데 저렇게 자신만만하게 사실을 알려줄 것 처럼 예고하던 감독은 이 가족의 상황을 보다 보편적인 문제로 인식했는지 자살의 근거를 제시하기 보다는 일상을 보여주는데 주력한다. 심지어는 배우 개개의 인물을 보여주기 보다는 공산품을 비추는 것으로 대신하여 가족에게서 얼굴을 빼앗는다. 그래서 작중 가족의 모습은 우리의 일상과 크게 다르진 않다. 이렇게 가오를 잡던 하네케는 더 나아가 일상의 모습들을 씬과 씬의 연관성을 없애며 무심한 듯 툭, 툭, 툭 끊어서 보여준다. 이런 형식이 갖는 세가지의 가능성을 추측할 수 있는데, 첫째는 감독이 무진장 변태라서 관객에게 또 한 가지 참여를 요구했다는 가능성. 컷을 관객들의 뇌내 활발한 화학작용으로 의미부여 하고 씬과 씬의 단편적 상황을 재구성, 퍼즐처럼 파악하여 저 가족을 니 맘대로 한번 재단해봐라는 요구일 수도 있겠다는 소리고. 둘째는 아까와 마찬가지로 연관성을 배재하여 줄거리를 거세하면 이 영화가 니들 모든 가족에게 해당되는 얘기라는 협박에 어느 정도 강조를 하는 효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점이다. 마지막으로는 보여지는 내용으로 미루어 짐작해 보면, 영화에서는 구성원들이 서로를 이해하는 것 같아 보이지도 않고, 소통에 그리 능동적으로 참여하려는 것 같아 보이지도 않는데. 이러한 소통의 단절이라는 테마를 형식상에 담아보려는 시도 일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내가 본 하네케의 가능성들은 그리 유쾌하지는 않다. 

제7의 대륙?

 이 영화는 크게 두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앞부분에 비해 뒷부분은 길이가 짧아서 상대적으로 밀도가 높다. 또, 전반부가 별 쓰잘데기 없는 지루한 일상의 나열에 불과했다면 후반부는 일가족이 자살하는 장면만을 그려내는데 집중해 명확한 대비가 있어 보다 충격적인 파트가 된다. (물론 여기도 늘어져서 엄청나게 지루하다.) 이 2번째 파트는 결말이라기 보다는 절정에 가깝다. 음악으로 치자면 그 왜 있지 않은가 초반에 살금살금 진행하다가 막판에 빵하고 터뜨리는 소위 드라마틱한 구성말이다. 그래선지 앞부분에 던져둔 이미지를 조립하는데 집중하는데 여기서 가장 크게 기능하는 것은 역시 소리다. 물세례 소리와 텔레비젼의 소리를 엮는 부분에 이르러서는 으아 라는 탄성이 나왔는데. 딱히 감격했다기 보다는 어느 정도 감독이 낸 숙제를 해결했다는 느낌이 들어서였다. 전반적으로 영화내내 커다랗게 지배하는 이미지는 단절이다. 앞서 말하기도 했고, 실제로도 영화를 보면서도 왜 이렇게 구성원들이 서로 대화가 적지? 또 서로를 이해하는 척이라도 하질 않지? 왜 마지막에 이르러서 부모님에게 보내는 편지에까지 자살의 이유를 밝히지 않지? 심지어는 영화 자체와 나 사이에도 '이해할 수 없는'으로 포장되는 소통의 단절이 있는 듯 하니까. 보다 근본적인 까닭이 필요한 이런 상황에 대해 감독이 너무 말을 아끼는 바람에 어림 짐작으로 대충 때려보면. 전반적으로 미디어가 표상하는 그림이랄까 그 자체가 억제력을 대변한다. 무엇에 관한 억제력이냐 하면 관계에 대한 그래서 관계를 끊어대는 힘이 있어서 너와 나는 서로에 대해 잘 알 수 없다는 부정적인 인식. 그리고 그 인식 자체의 출발점도 가족이기에 더더더더더욱 부정적인 그런 이야기. 이러한 억제력이 작용하는 장(場), 그런 힘의 논리가 작용하는 공간이 있고 그 곳은 어디에나 있다. 영화에서 가족은 죽을 때 까지 미디어를 끄지 못하며 초반에 등장인물에 입을 빌려 나타나는 "결국엔 반 전체가 안경을 쓰게 되었죠" 라는 이야기는 결과적으로는 이러한 미디어의 어디에나 있음을 경계하는 메세지이자 너도 나도 쟤도 결국엔 눈이 멀때까지 TV를 보게 되겠지 라는 냉소. 나는 영화를 보며 제목에 대한 의미를 이렇게 보았다. 힘이 작용하는, 동시에 어디에나 있는 초 대륙적인 공간. 
 이제 미디어를 꺼야할 시간이 왔는데도, 우리는 이를 끄지 못한다. 원초적인 욕구보다 더 아래쪽에 있는 후천적인 강박이라니. 솔직히 터무니 없이 멀리 간것 같기는 해도 심정적으로 어느 정도는 동의를 할 수 있다는 점에서 나도 얼핏 느끼고 있었던 게 아닐까 싶다. 그래 씨발 꺼야하는데 불가능하다면 까기라도 하자.

한줄평 : 희대의 변태 하감독 데뷔작, 다수의 장점이 존재 하지만 이 장점을 모두 덮을 만한 지루함으로 보는 이를 분노케한다.
평점 : 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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